일산룸 총책임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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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공공적 윤상법률과 공치안는 기억할 일이다. 미처도 철이 없음인가? 철이 불가능하다는 건 ‘제 향년를 모른다’는 얘긴데, 남의 세평만 감각 안 쓴다면 도리어 속세살이엔 철이 없는 게 더 만만하다 지도 모른다. 고장 산행뒷면 그 설렘은 더 크다. 진악산장 이순(耳順)을 지나도 늘 산행 어제은 설렌다.

 

 

산행 어귀 산행 어귀 진악광장에서 진악산 고개까진 2. 단조롭다 체조 후 산행에 나서는데, 1년 내내 번거롭다 코로나 탓에 늘 보이던 산우들이 보이질 않는다. 동기기후치곤 참 포근하니, 하마터면 춘화도 피어날 강세다. 가묘역에서 상오 7시에 떠난 충남 금산 진악산행 승합차, 상오 9시 50분 진악광장(진악연실) 주차소에 우릴 쏟아낸다.

 

 

벅수 삼가리 이곳에 왠 벅수일까? 혹 극히터전 산고을 거민들의 국가묘 돌무지몽매가 있었던 곳? 아니면 산신제단터? 제 공상이 골 속을 오가니, 가뜩이나 고단하다 산행 어귀의 숨쉬기은 더 거칠어진다. 저런 곳까지 감각 쓸 가량로 왕국 광이 풍성해졌음이 자랑스럽고, 유람생업에 대한 지자체의 경세제민이념 기복도 획기적이다. 어귀 땔감데크 층계을 보니, 지자체마다 산에 퍼붇는 예견도 상당할 듯하다. 2km 가량(1때 남짓) 거리지만, 30분 가량 올라 능선에 닿으면 고개까진 안일하다 장단란다.

 

 

벅수은 향풍공경 중 기자속(祈子俗, 아들유신 공경)에 맥이 닿는다. 나말여초 ‘노수’이, 고려 중기 이래 ‘벅수’으로, 괴뢰(人形) 벅수은 근세조선 후반기 등장했다. 벅수 삼가리벅수은 고을간의 경계선표식 또는 노표나 고을의 건널목지기신, 절 문란 표식, 약한 것을 보호하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몫과 기능을 했다. 일행은 이곳에서 대식을 돌린다.

 

 

기하 지나지 않아 오누이 여가에 놈가 활기자, 장 승상은 처절한 각오에 그만 결정을 한다. “오누이정사를 가만히 지속한다”고 주장한 장 승상의 아들딸가 검사대상물으로 가결됐다. 단체조영 “먼 고대 공임과 신자들이 ‘친오누이를 외딴 섬에 거리면 어떻게 될까’란는 윤상적 문를 두고 내기를 했다. 이래 저래 풍요의 동경은 군걱정(祈雨)와 근로력 확보(아들유신)로 통하다다.

 

 

콧 끝으로 새큼한 솔향기를 기대했는데, 동기철이라 그런지 가만히 찬대기만 비강을 파고든다. 가슴팍 가득가득 거친 숨쉬기을 달고 오르면 능선길 옆로 송목들이 도열한다. 솔밭을 만나다. 공임은 오륜의 값어치을 개화하기 가해, 장 승상의 겉맵시을 돌이나 땔감에 새겨 거국에 세웠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벅수 명목 까닭가 속세 속을 떠돈다.

 

 

송목와 참땔감는 천적이다. 송목는 척박한 땅에 끼얹다 박고 살다가, 잎이 넓어 슬하에서도 잘 자라는 음수(陰樹, 넓은잎나무)에게 터전 양보한다. 송목 숲 송목는 일광을 좋아해 양수(陽樹)라 불린다. 근역 산 각처엔 송목가 자라고 있지만, 예와 같이 기슭이나 고개을 가리지 않고 송목가 있는 산은 드물고, 조영과 같이 주로 능선 상으로 송목들이 몰려있다.

 

 

이래 송목의 생사은 명 손에 달렸다. 이런 기복경로을 ‘숲의 천이’라 하는데,능선에 송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섰다면 ‘숲의 천이’가 막판란 언급다. 송목가 물러간 터전에 참땔감류와 서어땔감류가 넓게 터전 잡은 숲을 ‘극상림’이라고 부른다. 참땔감의 결실인 도토리를 송목는 솔잎을 떨궈 덮지만, 그들의 터전 각축은 늘 송목의 참패로 끝나면서 결국 송목는 끊임없이 상방으로 밀려난다.

 

 

총체적으로 이같이 멋들어지다 조람처는 기운이 가득그득하다 용한 곳이 많다. 기후가 맑아 먼 곳까지 일목요연이다. 되다 어딘진 알 수 없어도 반자지목(四圍)가 일관무제(一望無際)니 가슴팍 짐짓 뻥 뚫린다. 멋들어지다 조망 송목 숲을 지나 탁 특인 능선 조람처에 서니 금산 시내가 훤히 보인다.

 

 

간두지세을 무릎 쓴 자 즉 땀한 자에 대한 보충이다(High risk, high reward). 바른 자에게만 멋들어지다 조람과 아름다운 산형를 유람할 수 권능가 주어진다. 산에선 꼼꼼하다 후불제다. 용한 터전에선 오등도 운기조식을 실시해 용을 써야 한다.

 

 

요사이은 코로나 기간를 맞아, 언택트(untact, 부대면) 힐링이 사세다. 산우들은 수하와 닮았다고 희희낙낙이다. 자연과이 만든 미술관이다. 낯바윗돌 멋들어지다 조람 속에 때때로 명목 손때을 거치지 않은 조각품도 보인다.

 

 

충남에선 진악산은 서대산(903m), 대둔산(877m), 계룡산(845m) 나중 높은 명산이다. 3m)은 금산의 진산으로 발췌원동기마다 슬쩍의 차별는 있지만 총체 100대 혹은 200대 명산으로 꼽는 멋들어지다 조망이 전경처럼 펼쳐지는 명산이다. 무명 암봉(595m) 진악산(進樂山, 732. 그러나 명간의 교류전류가 불가능하다면 독야청청 송목도 아니고 무슨 낙로 속세을 살아갈꼬.

 

 

혹 그런 의지로 진악산(進嶽山, 힘들게 나아가는 산)에서 진악산(進樂山, 즐겁게 나아가는 산)으로 명목이 바뀐 건 아닐까?관음개사봉 북편 단애 아래쪽 관음개사굴 관음개사봉 북편 가리개바윗돌 아래쪽 관음개사굴이 있다. 밧줄가 가설된 바윗돌능선 오름 구간 석일엔 오지 속 악산(嶽山)으로도 유명했다고 하는데, 막은 간두지세 구간마다 난간이나 밧줄를 가설해 안심하고 오를 수가 있다. 또 근역에서 미증유로 가삼을 수종한 산으로도 유명하다. ‘신증우리나라여지승람’엔 “서대산은 북쪽을 요체하고, 진악산은 남방셔츠을 가리었다”고 할만큼 응접을 받는 산이다.

 

 

“1500년 전 백제기간 효정이 지극한 강 씨 란 성를 가진 처리가 진악산 동편(막의 남뒷면 성곡리)에 살고 있었다. 관음개사봉 단애 속 관음개사굴 금산이 근역 미증유 가삼의 수종지가 도래하다 그 까닭가 되는 민간고담이 존재한다. 당연히 100m 가량 내려갔다가 또다시 올라야하는 땀는 뒤따른다. 고대엔 관음개사굴이 단애 여가 험한 곳에 있어 담이 큰 약풀꾼 외엔 갈 수가 없었으나, 막은 단애 단애길에 철난간을 가설해 경각 나위가 있는 산우라면 수하든지 갈 수가 있다.

 

 

‘고담’는 믿거나 말거나지만, ‘민간고담’은 있는 실은을 보풀린 담론다. “관음개사굴 안 “강 처리는 그 끼얹다 캐어 모께 달여 드리자 모민병이 완치됐다”는 민간고담이다. 지극한 효정에 감명적한 산신이 꿈 속에 나타나 ‘관앙불봉(관음개사봉, 개조봉) 암벽에 탈 빨간 결실 3개가 달린 새김 있을 것이니, 그 근원를 달여 드려라’란 담론를 듣고 관음개사봉 동편 단애을 헤맨 끝에 그 풀을 찾아낸다. 병으로 누운 노모의 완치를 빌기 가해 관음개사굴에 들어가 100일 기구를 드린다.

 

 

관음개사굴 무슨 일을 성사시키려면 강 처리의 예와 같이 성실하고 진실하고 간절함이 긴하다. 그 근원의 겉맵시이 꼭 명목 맵시을 닮은 마와 같아, 가삼(人蔘)이라고 붙였다는데, 그거이 금산 가삼의 근원이다. 강 처리는 그 신스런 풀의 붉디붉다 결실를 남뒷면 성곡리 개안고을에 심어 수종했다. 당연히 발자취는 있는 가만히의 실은적 기억이고.

 

 

하여 일을 성공했을 땐 선대들이 도와주다 음덕이 쌓였을 거란 담론다. 이를 총체 선대의 음덕(덕분)을 받아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슨 일을 이루려면 강 처리의 예처럼 단숨에에 성사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100일 기구면 대국부 삶과 죽음을 오가는 기절한 사정였을 것으로 대중된다.

 

 

7(21일)일간 기구가 긴하다는 것, 네째는 꿈에 산신이나 부처 혹은 개사이 나타난다는 것, 오째는 약풀나 생수 또는 이인(異人)을 만나야 한다는 것 등이다. 갑가 집안에 아픈 명이 있을 것, 버금는 결단코 효자 효부 열녀가 있을 것, 세째는 100일이나 3. 드론으로 찍은 관음개사굴 민간고담이나 고담 등을 살펴보면 신스런 일이 나오다 때 몇 아지 요소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혹 효자 강 처리가 곧 죽을 듯 하니, 산신이 KTX를 타고 달려왔을 도성 있다.

 

 

거에 공교에서 정수리의 값어치로 여기는 충효역사상 중 ‘효’까지 들어가니, 그야 말년 유불선이 병립하는 가삼 까닭설이다. 산신을 고난 굴이라면 도교풍의 명목이 붙어야 하는데, 왜 ‘관음개사’이란 불법 개사의 명목을 붙였을까? 대관절로 백제기간라고 했으니 왕족과 지배계급 등 속세권한을 등에 업은 불법가 강역고장에서 호국의 치환병영 몫을 하면서 산명목도 불법식으로 개칭명령하다 것으로 보인다. 관음개사봉 북편 가리개바윗돌(정수리가 관음개사봉 고개) 관음개사봉 북편 관음개사굴이 있는 단애을 딴 명목으로 ‘가리개바윗돌’라고도 한다. 본적으로 선대의 음덕과 개개인의 매진이 결단코 뒤따라야 함은 당연히이다.

 

 

관음개사봉 고개석(732m) 결국 관음개사봉 고개이다. 드론으로 찍은 관음개사굴 조영 바른편을 보면 밧줄가 매달려 있는데 그 걸 잡고 오르는 슬쩍 험한 경주로와 내려왔던 땔감테크 층계을 또다시 오르는 안정하다 경주로가 그거이다. 관음개사굴에서 고개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개다. 관음개사봉 관음개사봉 고개으로 오르는 길에 본 조람, 어귀부터 날골까지 능선에만 문면, 진악산 산행은 멋들어지다 조람과 어깨동무하게 해준다.

 

 

석일 읽은 최남선 저서 ‘심춘순례’에 “한 굽이 나다 깎아지른 듯한 석벽이 푸른 이끼에 덥혔고 또 한 굽이 나다 활등 같은 흙산등성이에 푸른 송목가 연로하다을 자랑한다. 유유자적에 휘적휘적, 목하 내 심혼 사정를 보여주는 단어다. 또 결단코 바쁠게 없으니 미죽완보(微吟緩步, 흥얼거리며 천천히 걷는다)가 안보이다. 이곳까지 이런 저런 담론와 관음개사굴 그리고 조영촬영에 때을 뺐기다 보니 약 2때만에 고개에 닿는다.

 

 

넓고 평평한 데크를 보니, 가교가 풀리며 가만히 수서 앉는다. 오공식사 관음개사봉 고개엔 헬기장과 산불감독초소 그리고 고개석과 조영 속 조망데크가 놓였다. 막 내 감동이 딱 그거이다. 어딘가 발만 옮기면 심상치 않은 유람거리가 있으니 다린 바뿔지언정 눈은 살찐다”고 적혔다.

 

 

광음 탓인지 갈수록 무거운 것이, 내 몸을 버겁게 한다. 보온물병이 무겁기 까닭이다. 어느새부턴가 나의 동기산행 오공메뉴가 컵라면에서 편의점 샌드곳로 바뀐다. ‘떡 본 김에 제살 지낸다’고, 앉은 김에 오공식사 때이다.

 

 

관음개사봉 동편 개삼저수지 개삼저수지 근린에, 1500년 전 미증유로 남뒷면 성곡리 개안고을 개삼터(開蔘址)에서 가삼을 수종하기 시작된 의지를 되살리고자, 1983년 개삼각법(開蔘閣)을 건립했다. 누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맛난 먹을거리을 그럭저럭 꼽으리라. 그럼 난쟁이(小人)에게 삼락은 뭘까? 수하 “갑는 때 날 때마다 경물 좋은 산하를 찾아가 보는 일, 둘짼 벗과 노는 기쁨, 셋째는 맛나다 먹을거리”이라고 했다. 맹자는 남편삼락(君子三樂)을 “갑는 고비가 다 살아있고 형제자매가 무고한 것, 버금는 공중을 우러르다도 망신이 없고 극히터전 명에게도 망신이 없는 것, 셋짼 세계의 인재들을 얻어서 가르침을 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원체 관음개사봉보다 앞으로 갈 물굴봉(737m)이 5m나 더 높은데 왜 관음개사봉이 진악산의 정수리봉(고개봉)이 됐을까? 고개(정수리봉)의 곳에 올라설 땐 봉오등가 높다고만 되는 게 아니다. 고개 조람 고개에서 보는 반자지목의 조람은 멋지다. 개삼터 극히터전엔 논제공원을 짓고 금산 가삼 랜드마크와 강 처리 민간고담의 조형예술물들과 연근별 가삼 본보기의 가설, 개삼광장과 산책로 등 다양한 볼거리와 구가하다거리를 조성했다. 연차 가삼사육제를 알리는 ‘개삼제’를 교제하다 곳이다.

 

 

물굴봉(737m) 고개에서 바라본 물굴봉이다. 더군다나 금산 쪽에선 진악산을 바라보면, 관음개사봉이 물굴봉보다 더 높게 보인다는 언급도 있다. 가야산 칠불봉(1433m)보다 우두봉(상왕봉, 1430m)을, 또 주흘산 영봉(1106m)보다 정수리봉(1075m)을 고개으로 감동씨하듯 말이다. 예부터 극히터전 고을 명들과 공경적으로나 발자취적으로 교감을 나누며 삶과 밀접해야 정수리봉의 몫을 부여한다.

 

 

암릉 조망대 진악산은 암릉과 조람 산행을 할 수 있는 산으로, 짧고 굵게 산행의 백미를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멋들어지다 경물와 조람만 보면, 김시습은 대성통곡하고, 화담 서경덕은 춤을 췄나 보다. 진악산처럼 앞이 탁 뚫리다 곳에서 더 거하다, 감동도 나위롭고 탁 트여 호호탕탕(浩浩蕩蕩) 시원하게 목숨도 살 듯하다. 사방 반자지목를 바라봐도 한점 막힘이 없는 조람이다.

 

 

근역 비보풍수 시조인 도선국사는 근역 꼴은 행주형(行舟形)이니 높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높이라고 하셨다. 무거운 고개석이 없는 게 도리어 자연과스럽고 옛스럽다. 물굴봉 고개 물굴봉 고개엔 돌무지몽매가 고개석을 갈음한다. 명산은 높거나 때이 많이 걸리는 산이 아니라, 멋들어지다 조망과 천년반성의 기운 그리고 사시사철 물이 철철 흐르는 깊고 푸른 산골짜기은 당연히 발자취와 민간고담 그리고 고담가 윤택하다 금상첨화의 명산이다.

 

 

그래서 봉오등 명목을 ‘물기척 소요한 굴이 있는 봉오등’란 뜻에서 까닭된 명목이란다. 옛 글에 따르면 진악산 일인자 물굴봉 아랜 바윗돌굴이 있는데 몇 걸음걸이 꺼지다 물기척가 소요하여 천심를 헤아릴 수 불가능하다고 한다. 물굴봉(737m, 물골산, 진악산 일인자)은 정수리봉인 관음개사봉 고개(732m)보다 5m 높은 737m다. 아무튼 물굴봉 고개 속 돌무지몽매는 산꾼들이 낱 둘 올린 게 저렇게 자라나 공중로 그 소기을 전하고 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니, 용굴 안에서 쉬던 용은 승세계면서 비를 뿌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물굴봉 아래쪽 굴을 용굴이라고 했고, 천한 때면 그 물기척 소요한 용굴에 산중호걸 골 넣고 군걱정제를 올렸다고 한다. 진악산 옛 담론 속에서도 진악산을 일러 의지 골 국부이라고 했다. 물굴봉 고개 조람 대국부 산맥을 일러 의지 꿈틀대는 생김새이라고 하여 용맥이라고 했다.

 

 

물굴봉 고개 조람 마고할멈의 기능가 구릉을 만들고, 산하도 만들었다. 개그 기척로 “수하 똥을 싸고 덮어놓은 게, 광음이 흘러 돌무지몽매가 됐다”고 했던가? 배설물을 감춘 돌무지몽매건 원을 빈 석탑이건, 돌무지몽매 겉맵시이 아름답고 고풍스럽다. 돌무지몽매(케른) 어느 산꾼이 올려놓은 돌덩어리 안위, 이곳 물굴봉 고개을 과도하다 산꾼들마다 낱 둘 올려 놓은 게 석탑이 됐다. 당연히 군걱정제 후 암장한 묘를 파내 부정직을 없애는 건 본이다.

 

 

그래서 건곤의 조화가 필수적이다. 땅과 공중을 품은 자연과 속 사람됨은 천기(天氣)와 지덕(地德)을 본받고 자란다. 땅은 진중하고 공중은 변덕스럽다. 가위 묘하기구 또 진부하기구 하다.

 

 

또 천애단애에 횡막혀 봉오등 사면을 다 찾아보기에도 역결여이다. 일행의 대국부이 이미 내려간 터라 더 때을 자연과제단이 놓인 공동검출하다에 보낼 도성 없었다. 작은 공극의 굴들이 있었지만 물소린 들리지 않았고, 단애에 있어 다가가기가 두렵다. 물굴봉 극히터전 굴 일행 중 나를 포함해 몇이서 용굴을 찾으려고 물굴봉 가장자리를 돌아본다.

 

 

이곳에 묘를 쓰면 비가 오지 않아 가물이 내리됐다. ‘근역지목총람, 충낭군엔 물굴에 창해 “(생략) 굴 위 지세이 호롱형인데 이곳에 묘를 쓰면 사체는 용이 돼 승세계고 그 집안에 경사가 잦는다고 해 이곳에 묘를 쓰는 명이 있다. 그래서 진악산엔 금을 노린 굴들이 많을까? 아무튼 금의 유무를 알아보기 가해 시추한 굴들도 있을 듯하다. 물굴봉 극히터전 굴들 날골에 있는 보옥사(寶石寺)의 명목 까닭 중 ‘산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법당에 봉헌했기 까닭’이란 설이 있다.

 

 

옛 고을 노년들은 물굴봉 용굴 근린에서 비린내 나는 명태나 아침 또는 은린옥척를 먹다가 비린내를 미워하다 이무기에게 강박을 받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무기가 물굴(용굴) 속에 살게 된 까닭는, 아득한 고대 동해대양에 살던 이무기가 조수 속 은린옥척들의 비린내 탓에 살의가 거북이결점 수신님께 ‘수많은 은린옥척 여가에서 살의가 어려우니 산 좋고 물 좋고 대기 청청하다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해 이곳에 살게 됐다”고 전한다. 물굴봉 극히터전 굴 또 딴 글에선 “예부터 전해오는 고담에 그 용굴 물 속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오랜 광음 그 안에서 살았다. 그 땐 고을 명들이 모여 그 묘를 결단코 찾아서 파냈다”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생긴 겉맵시은 가만히 멘히르처럼 보이는데, 고대엔 ‘절구에 놓인 절구깨(절구방앗공이)’ 겉맵시이었는데 광음의 풍화 까닭에 저렇게 변했다고 전한다. 기물통바윗돌는 벼루에 먹을 세운 듯한 겉맵시의 고동빛 바윗돌로, 기물통은 충청권에서 ‘절구을’ 이르는 토음다. 기물통바윗돌 물굴봉을 벗어나 보옥사로 향하면, 기하 안 돼 ‘기물통바윗돌’가 나타난다. 물기척 소요한 용굴이 기하나 깊은지 명주 몇 덩어리를 다 풀어도,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새부턴가 산행 중 고난 약물터 위에 절이나 암자택 있으면, 그 물맛을 안 본지가 더됐다. 그 아래쪽 물색은 오염된 빛인지 아니면 철분이 섞인 물색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영천암 아래쪽 석축을 따라 흐르는 오염된 물색 한참을 내려서니 닳다 암자 낱가 보이는데 개산가량으로 영천암(靈泉庵)인 듯하다. 그러나 기물통바윗돌의 맵시이 절구방앗공이 겉맵시과 비슷하니, 아들유신를 근원하는 멘히르(기자석) 즉 기자공경의 바윗돌토테미즘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행자인 운수납자도 편해야, 도탈한 부처도 징표으로 나올 듯하다. 속세이 5G 기간니, 산간은 LTE 기간다. 요사이은 이행하기가 참 편리해졌다. 영천암 삼가리 영천암 암자까지 역청가 놓였다.

 

 

영천암은 886년(계림 후반기 정강왕 원년)에 조구 대사에 의해 창립됐다. 영천암 본당인 무한량수각(편액 2개 ‘영천암’과 ‘무한량수각’) 뒤편 돌층계을 오르면 샘솟아나다 영천생수로 고명하다 암자다. 나도 그럴진대 이행자는 오죽하랴! 영천암 영천암은 보옥사의 산내암자로 보옥사와 마찬아지로 천년사암(千年寺庵)이다. 내림길에 오름길의 땀로움을 만나면 가만히 과도하다 게 관례이 된다.

 

 

영천암엔 무한량수각과 북두칠성각 그리고 암귀띔 요사채 등 3채의 건조물이 있고, 이곳에서 1km 가량 내려탈 보옥사가 나온다. 영천암이란 명목은 무한량수각 뒤 바윗돌굴샘(암천 巖泉)에서 석건널목지기(石間水)가 끊임없이 솟아나다데, 이 생수이 만병에 특효가 있는 신통력한 샘이라고 ‘영천암’이란 명목이 붙었다. 885년 보옥사를 세운 조구 대사는 나의 이행정진을 가해 영천암을 세웠다고 전한다. 옛 암자 건조물은 사라지고, 1999년 중수한 무한량수각으로 또났다.

 

 

보옥사 뒷공론 보옥사로 내려가는 산골짜기가엔 ‘구암(龜岩)’이란 각각(刻字)가 새겨진 바윗돌도 있다는데, 아무리 산골짜기가를 오가도 보이질 않는다. 자연과적으로 생긴 돌샘이라면 지리 용어로 ‘나마(gnamma)’라고 하는데, 주로 풍혈기능에 의해 생성된다. 바윗돌 위에 인위 돌샘을 조성한 걸 향풍공경에선 ‘용알터(우승배 견제)바윗돌’라고 부르는데, 주로 이런 게슈탈트의 바윗돌에선 군걱정제를 지낸다. 생수바윗돌 보옥사로 향하는 길 옆 ‘생수바윗돌’가 나온다.

 

 

코로나 탓인지 명들의 도면자조차 없는 보옥사 경내, 오등 일행들이 들어문면서 왁자지껄해지자 절 냄새가 절로 환해지며, 그 냄새를 반기는 감동이다. 보옥대 대웅전 대한조계종 마곡사의 말사인 보옥사의 본보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급기 금일 산행의 끝판 관람처 보옥사 뒷공론을 들어선다. 경도 교외라면 팔을 거둬붙이고 찾아보겠지만, 갈 장단 먼 변명로 발길질을 돌리기구 수월하다.

 

 

보옥사란 명목은 절 전산에서 캔 금으로 불상을 만들고 봉헌했기 까닭에 붙인 명목이라고 전해진다. 보옥사는 계림 후반기 헌강왕 11년(885년) 조구(祖丘) 대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진체를 이은 당세의 달필로, 호남 고장 많은 고사엔 그의 필적들이 전해온다. 대웅전 편액을 쓴 붓필적가는 근세조선 막판 호남고장 고명하다 달필 완산 이삼만(完山 李三晩)이다.

 

 

승순을 제명하곤 낳은 놈들을 송두리째 견실하다 명성왕후가 황태자 이척의 무병장수를 기구하며 연고을 맺은 곳이 보옥사다. 명성왕후는 이 절을 중창해 왕족의 원찰로 발췌했다. 대웅전 건조물은 임란 때 소멸된 것을 명성왕후 민씨가 또다시 보수한다. 한철 절이 승할 땐 신도 3천여 명과 500여 명목 불가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허당은 이곳에서 이행하며 승병을 모은 영규대사의 법호다. 총체 고사의 고사전(祖師殿) 격으로, 기허당 안 바른편엔 임란 그때 승병장 영규 대사와 왼편엔 보옥사 창립자 조구화상의 초상화을 안치했다. 기허당 대웅전을 바라보면 왼편에 기허당((騎虛堂) 건조물이 있다. 명성왕후는 황태자 이척을 가해, 보옥사 외에도 거국 명산대천과 고사에 시주를 퍼붇는다.

 

 

이렇게 왕국와 살붙이를 가해 명맥을 초개와 같이 버린 분들을 모신 성한 곳에 들리면 자연과스럽게 깃을 여미게 된다. 반면 승고장과 힘을 섞다 같이 금산교전에서 순한정 민병을 가해선 ‘칠백의총’이 있다. 기허당 안 임란 때 금산교전에서 순한정 승고장을 기리는 위패 기허당 안에 임란 그때 제2차 금산교전에서 순한정 승고장의 망령을 기리는 위패(位牌)가 놓였다. 기허당 현판은 대웅전 현판을 쓴 완산 이삼만의 필적다.

 

 

1592년(선조 25년) 8월 18일에 치러진 제2차 금산교전에서 민병장 조헌과 승병장 영규대사 그리고 참전했던 민병과 승고장이 전원 순국했다. 그러나 왜병이 전라도 땅을 밟는 1592년 7월 웅치 아래쪽 안덕원(운장산과 마이산 여가)과 논리(대둔산과 운장산 여가) 교전에서 대패하곤 금산 부문으로 물러난다. 영동과 무주 그리고 금산(제1차 금산교전)을 점거한다. 임란 그때 전라좌도 수사절도사 이순신 장관에 의해 서해 전파로가 막히자, 왜병은 근세조선 수사의 뒤편금리 군병과 먹을거리전파 광인 전라도를 점거하고자 왜병 6진 고바야카나가 한양에서 충청으로 모처럼 내려온다.

 

 

의선각(毅禪閣) 대웅전 아래쪽 의선각(담력정진 선을 닦는 집)이 있다. 이곳에서 일행들은 열심히 길지 기운을 흡입요법했다. 보옥사 경내에선 산신각 터전가 극히 기운이 충만한 길지(明堂)이란 뜬소문이 자자하다. 보옥사 산신각 산중에 절을 새로 짓거나 불사(佛事)을 일으킬 땐 갑 앞서 산의 낭군인 산신의 거주지처 산신각을 극히 윗터전에 세운 후 이어 딴 전각을 세운다.

 

 

보옥사 범조종당 현판 딴 고사 강당 누사이 이곳에선 범조종당다. 목하는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는데, 충청도 공주가 고토인 영규대사는 갑사를 비롯해 제 고사에서 도성를 했는데 보옥사에도 머물렀다. 의선각 현판은 순조의 부마 창녕위 김병주(순조의 2녀 복온공주 낭군)가 썼다. 임란 전 승병장 기허당 영규 대사가 공주 갑사 청련암과 보옥사를 오가며 머물던 곳으로, 임란이 끝난 후 순한정 영규 대사의 충절을 기리고자 그의 초상화을 안치할 초상화각으로 짓고, 공임이 몸소 ‘의선’이란 편액을 하사했다고 한다.

 

 

범조종당 편액을 쓴 붓필적가는 근세조선 끝판 도화서원금리 영친왕의 붓필적 교직자을 지낸 해강 김규진(1868~1933)이고, 난와 대땔감를 그린 이는 죽농 안돈놀이(1872~1942, 요리점 명월관 태화관 낭군)이다. 대국부 범조종당는 대웅전 왼편에 놓여지는데 보옥사엔 대웅전 앞 바른편 강당 안에 놓였다. 대국부는 필적만이 그 위세을 뻐기다는 현판인데 이곳엔 도면까지 곁들여졌다. 범조종당의 현판 속 대땔감와 난 도면까지 곁들여진 게 특이하다.

 

 

한말 궁전을 나온 대령숙수 안돈놀이은 경영횡도 유명하지만, 한땐 서도를 수집하고 중개인을 하기구 했다. 고명하다 요리점 ‘명월관(明月館)’을 세운 죽농 안돈놀이(安淳煥, 1871-1942)은 궁전 대령숙수 입신출세이다. 김규진이야 널리 알려진 됨됨이이지만 ‘죽농’은 모르는 명들이 많다. 두 분은 거국의 고사을 함께 다니며, 이 같은 게슈탈트의 편액을 골고루 남겼다고 전한다.

 

 

산골짜기 곁에 있으니 짐짓 은행땔감가 자라기엔 노트(水氣)가 수석이다. 보옥사 은행땔감 보옥사 경내를 벗어나면 1000년 앞된 은행땔감(천연기념물 제365호)가 나타난다. 그는 해강 김규진의 공명을 받은 서도인이다. 죽농은 자기 서도에 능해 묵죽과 묵란으로 근세조선미술쇼에서 합격한 적이 있는 기능있는 화가다.

 

 

특히 보옥사 은행땔감는 왕국에 기적이 있을 때마다 일일 진일 울었다는데, 임란 때, 1910년 강압병탄 때도, 8. 계림기간 후반기 보옥사 창립자 조구 대사가 문하생 5인과 함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마크하다 뜻에서 둥글게 6주의 은행땔감를 심었는데, 그 땔감들이 각각 붙어 낱의 큰 땔감로 자랐다고 했다. 은행땔감는 노트만 윤택하다 본이 600년이라는데, 경도시 발췌 보호수 제1호 방학동 연산군 묘역 앞 은행땔감, 영동 천태산 영국사 은행땔감 등이 손꼽히는 더된 은행땔감다. 속세에서 일컬길 용문사 은행땔감(천연기념물 제30호) 나중으로 큰 은행땔감라고 했다.

 

 

총체 이런 신스런 장수목은 고을에 낱만 있으니, 보옥사 앞 불전골 고을의 건널목지기목이 되는 건 당연하다. 보옥사 은행땔감 은행땔감는 절뿐만 아니라 극히터전 고을에서도 떼목(신목, 건널목지기수)으로 모신다. 25 각오 때, 1992년 대가물 때도 이 땔감가 광대하다 울어 경사와 곤란을 앞서 알렸다고 한다. 15 해제과 6.

 

 

영수암(麒麟巖) 보옥사 은행땔감 곁엔 커다란 바윗돌가 보이는데, 그 바윗돌엔 ‘영수암’이란 각각와 명들의 명목들이 새겨졌다. 연차 단오날에 고을 명들과 보옥사 신도들이 모여 은행땔감 앞에서 갈음제(大神祭)를 교제하다데, 갈음제 참석해 원을 빌면 결단코 성공된다고 알려졌다. 보옥사 장수목 은행땔감는 안위 뻗을 아지가 땅으로 널리 뻗었고, 땅에 묻힌 아지에서 새 아지가 나왔고, 땔감의 본가지는 부러지지 않고 여태껏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갑작스레 부안 내소사 일맞춤 앞 솟구친 고을 건널목지기목 느티땔감가 각오난다.

 

 

조주선사의 언급도 들먹거리지만 실젠 고사에 소요되는 재목감의 전파이란 게 정론인 듯하다. 영수은 성년(聖人)이 속세에 나올 전조 또는 성왕(聖君)의 치세에 나오는 짐승이라는데, 혹 성왕이나 성년 즉 자주을 바라는 감동에서 새기진 않았을까?전땔감숲 옛 고사엔 전땔감를 많이 심는다. 공상 속 짐승 영수은 상각각운 짐승인 4령(四靈, 영수 거북이 봉황새 용) 중 낱로, 숫영수 ‘기(麒)’ 자와 암영수 ‘린(麟)’ 자택 섞다진 글씨다. 바윗돌 새겨진 각각엔 무슨 사연들이 숨어 있는지? 1935년에 새긴 각각와 각명들은 은행땔감 갈음제를 관장하는 고장 지속들의 명목이 아닐까 각오된다.

 

 

민병승장비 민병승장비는 영규대사의 순절비다. 양에선 강탄제 트리로 전땔감를 사용하는데, 그 까닭는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촛불과 별을 전땔감에 매단 것에서 비롯된다는 언급와 게르만으로 발견된 교역자택 떡갈땔감에 명을 제품로 매단 걸 보곤 그 후로 전땔감로 대관절했다고 한다. 근역 3대 전땔감 숲은 오대산 월정사 일맞춤 안 전땔감숲과 광릉수목원 전땔감숲 그리고 내소사 문 전땔감숲이다. 송목는 대국부이 봉산정략과 맞물려 궁전 개조 외엔 베어내 사용하질 못하게 했으니, 쭉쭉 미치다 전땔감가 고사 쓰임새론 안성맞춤인 듯 싶다.

 

 

비각 바른편엔 민병승장비의 내역을 암글로 새김하여 청동판에 새겨놓았다. 민병승장비를 세울 때 영규 대사의 초상화을 모신 가묘 의선모 보옥사 경내에 함께 지어졌다. 민병승장비는 1840년(헌종 6년) 5월에 금산 군수가 절 문에 세웠으나 1940년 일제 순사가 자획을 뭉개 땅 속에 묻었던 것을 해제과 함께 또다시 찾아내 세웠다. 휴정의 문하생 영규 대사(?~1592)는 일찍 승장으로서 익힌 무기를 따를 자택 없더니, 임란이 터지자 승병 500명을 규합해 중봉 조헌과 함께 약주를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논리와 웅치 교전에서 패해 선군한 왜장 고바야까(왜병 제6진 장수로 나중 풍신수길의 5대로)와 금산벌에서 결전을 벌인 끝에 전원 순한정다.

 

 

구하에 와야 안성맞춤이라지만 적벽강을 보러 구하을 맞추기란 가위 고단하다 일이다. 금산 적벽강(赤壁江) 산행 후 금산에 간 김에 40분을 달려 수통리 적벽강을 본다. 혹 일맞춤 외출이 절단된 건 승속(僧俗)의 경계선가 없어지고, 승속이 낱가 된 걸 마크하다 건 아닌지? 이렇게 보옥사 주차소으로 가며, 금일의 산행이 끝을 맺는다. 보옥사 일맞춤 광음은 흘러 일맞춤은 함께가 아닌 자기의 문이 됐고, 그 외출은 구름과 기운 그리고 명이 아닌 자연과만이 나들이하다다.

 

 

적벽강설 간류는 중국 양자강 상류공공 적벽강이라고 한다. ‘적벽강’은 말 가만히 강물에 붉디붉다 단애이 비추니 물색도 붉디붉다 빛을 띄워 적벽강이 됐다. 근역에 적벽강 명목이 붙은 곳은 전남 화순 동복호 적벽강과 전북 부안 연안 적벽강 그리고 금산 사역하다 수통리 적벽강이다. 근린에 왔다가 이렇게 자연과스럽게 보는 게 가중이 불가능하다.

 

 

남한강이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면서 ‘여강’이 되고, 북강이 양평 용진을 흐를 땐 ‘용진강’이 되며, 금강석이 부여 부소산성 극히터전을 지날 땐 ‘백마강’이 되는 것과 마찬아지다. 수통리 부각산 적벽 기슭 아래쪽로 흐르는 금강석을 특히 적벽강이라고 부른다. 금산 적벽강설 명목도 원체 금강석이다. 오등 산하 중 그곳과 비슷하면, 근세조선기간 내륙문물 공경자들은 무요소 적벽강설 명목을 붙였다.

 

 

산행 후 그 고장 특미까지 맛을 리포트 싶었는데, 다행히 적벽강 앞에 이곳 특미인 어죽을 파는 레스토랑이 있었다. 적벽강 레스토랑 앞 피엠 5시, 오공을 먹은 지 5때 가량가 지나니 출출해지기 시작한다. 구하뒷면 서글서글하다 기운과 함께 물장구 치며 귀휴를 보내려는 피서객으로 가득가득하단 뜬소문이다. 금산 사역하다 수통리 적벽강 금강석물이 사역하다 수통리에 이르면 적벽강이 되고, 부각산 괴암적벽 들어맞다 편엔 모래밭이 펼쳐진다.

 

 

가만히 그러려니 하고 맛나게 먹는 게 보약이 되는 지름장단다. 고대이야 적벽강에서 잡았겠지만 막이야 그러겠나 싶다. 적벽강 어죽 적벽강에서 잡은 민은린옥척로 끓인 어죽이다. 또 레스토랑 내 대짜 창을 통해 적벽강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니, 그야 말년 꿩 먹고 알 먹기다.

 

 

적벽교 적벽강을 보러가는 길엔 적벽교를 건너야 하는데, 폭이 좁아 대짜 승합차가 가질 못해 도행로 다릴 건너야 했다. 금산 어죽은 쌀을 푹 끓여 천성의 어죽을 만드는 게 특별이다. 그 가택은 쌀 갈음 면로 성행를 쳤다. 경도에서 파주 방면으로 가다보면 고양 어느 곳인가에 어죽면가 유명하다.

 

 

피엠 6시경 적벽교를 건너 승합차로 돌아간다. 아무쪼록 음덕은 일단 깔아 놓은 게 정수리다. 오지였던 이곳에 이 다릴 지어놓곤, 여태껏 그 때 그 때 그 국민대표은 찬양을 듣는다. 1984년 놈를 꼬아 만든 출렁가교가 목하의 콘크리트 가교인 적벽교로 바뀐다.

 

 

정겨운 일행들과 일일를 즐겁게 보냈고, 배도 포만감에 가득가득하니, 세상만사가 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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